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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id="content">
<h1>2장. 진보와 엔트로피</h1>
<p>앞서 언급했듯이 자연의 무질서를 향한 통계적 경향, 닫힌 시스템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경향은 열역학 제 2법칙에 의해 표현된다. 우리 인류는 닫힌 시스템이 아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음식물을 섭취해서 에너지를 생산하며,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우리 생명력의 근원을 포함하는 더 큰 세상의 일부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 정보에 기반해 행동한다는 것이다.</p>
<p>우리와 환경의 관계에 관한 한 이 진술의 중요성은 이미 물리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관점에서 정보의 역할에 대한, "맥스웰 유령(demon)"이라 불리는, 클락 맥스웰의 훌륭한 표현이 있는데,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을것 같다.</p>
<p>모든 곳의 온도가 일정한 가스 상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가스 입자 중 어떤 것은 다른 것들보다 빠를 것이다. 이제 상자 안에 가스를 열 엔진으로 통과시키는 작은 문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열엔진의 배기관은 또다른 문을 통해서 다시 가스상자로 연결된다. 각각의 문에는 다가오는 분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속도에 따라 문을 열고 닫을수있는 작은 존재가 있다.</p>
<p>첫번째 문에 있는 유령은 상자로부터 오는 빠른 속도의 분자에게만 문을 열고 느린 속도의 분자에게는 문을 닫는다. 두번째 문에 있는 유령의 역할은 정확히 그 반대다: 상자로부터 오는 느린 속도의 분자에게만 문을 열고 빠른 속도의 분자에게는 문을 닫는다. 결과적으로 한쪽의 온도는 높아지고, 다른쪽의 온도는 낮아지면서 두번째 유형의 영구기관을 만든다. 즉, 주어진 시스템 내의 에너지의 합은 변치 않는다는 열역학 제1법칙은 위배하지 않지만, 에너지는 자발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배하는 영구기관이다. 다르게 말하면, 맥스웰 유령은 엔트로피 증가의 경향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p>
<p>이 아이디어를 좀더 잘 설명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두 개의 회전문 사이를 서성거리는 군중을 생각해 보자. 하나의 회전문으로는 특정한 속도로 달리는 사람만 내보내고, 다른 하나의 문으로는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만 내보낸다.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우연한 움직임은 첫번째 회전문을 빠르게 통과하는 사람들의 흐름과 두번째 회전문을 느리게 통과하는 사람들의 흐름으로 바뀔 것이다. 이 두 개의 회전문이 트레드밀(역자주: 러닝머신 혹은 발로 밟아 돌리는 기구)을 설치한 통로와 연결된다면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느린 사람들에 비해 트레드밀을 한쪽 방향으로 더 잘 돌리게 될 것이고, 우리는 군중들의 우연한 움직임으로부터 유용한 에너지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p>
<p>여기서 우리 세대의 물리학과 과거 세대의 물리학 사이의 매우 흥미로운 차이점이 생겨난다. 19세기 물리학에서는 정보를 얻는데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로 맥스웰의 물리학에서는 맥스웰의 유령이 자신의 고유한 전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반면에 현대 물리학은 유령이 문을 열고 닫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일종의 감각기관-이 경우에는 눈에 해당하는-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유령의 눈에 부딪히는 빛은 기계적인 움직임에 딸려오는 에너지 없는 보충물이 아니라 기계적인 움직임 자체의 주요 속성의 일부이다. 빛이 측정도구를 때리지 않고서는 어떤 측정도구도 빛을 받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빛이 입자를 때리지 않고서는 입자의 위치를 알려줄 수 없다. 이건 우리가 순수하게 역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가스실이 단순히 가스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형상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가스와 빛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가스와 빛이 평형 상태에 있다면, 현대 물리학의 원칙에 따라 맥스웰의 유령은 빛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님이 될 것이라는걸 입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방향에서 날아오는 빛의 구름을 보게 될텐데 이를 통해서는 가스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맥스웰의 유령은 평형상태가 아닌 시스템에서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에서는 빛과 가스 입자의 일정한 충돌이 빛과 가스를 평형상태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유령이 엔트로피의 일반적인 방향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사그러들고 말것이다.</p>
<p>맥 스웰의 유령은 시스템 외부에서 추가적인 빛이 공급되야만 무한히 일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입자들 자체의 기계적인 온도와 일치하지 않게 된다. 이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상황인데,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하는, 우리 주변의 우주를 보고 있고 이 태양은 지구상의 기계적 시스템과 전혀 평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수천도의 태양으로 부터 나오는 빛을 통해 화씨 50도 또는 60도의 온도를 가지는 입자들을 마주 대하고 있다.</p>
<p>평형상태에 있지 않은 시스템 혹은 그 시스템의 일부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할 필요가 없다. 엔트로피는 부분적으로 감소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 비평형성은 단지 결국엔 평형상태로 가게 되어있는 내리막길의 한 단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우리는 죽을 것이고, 우리를 둘러싼 우주 전체가 열죽음(heat death) 상태로 소멸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 상태에서 세상은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열평형으로 축소될 것이다. 작고 무의미한 파동 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생기없는 단일성(uniformity)만 남게 될 것이다.</p>
<p>그러나 우리는 아직 세상의 죽음의 마지막 무대에 있는 관객은 아니다. 사실 이 마지막 무대들엔 관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장 염두에 두고 있는 세상에선, 비록 영원의 시간에선 사소한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우리의 목적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무대들이 있고, 거기서 엔트로피는 증가하지 않으며 조직과 그 상관어인 정보가 형성되고 있다.</p>
<p>앞서 언급한, 고립된 지역에서의 조직의 증가는 단지 살아있는 생명체의 조직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계 역시, 우리들의 조직에 비하면 투박하고 불완전한 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지역적이고 일시적인 정보의 축적에 기여하고 있다.</p>
<p>여 기서 나는 잠시 생명, 목적, 영혼 등의 단어가 정교한 과학적 사고에 매우 부적절하다는 의미론적 관점을 언급하고 싶다. 이 용어들은 특정 현상들의 그룹을 우리가 하나의 통일성으로 인식함으로 인해 의미를 얻었지만, 사실상 이 통일성을 특징지을 적절한 기반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우리가 "생명 현상"으로 이름 붙인 특성의 일정부분을 가지긴 하지만 "생명"이란 용어를 정의하는 모든 연관된 양상에 부합하지는 않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이들을 포함시킬 수 있도록 "생명"이란 단어를 확장할 것인지 아니면 이 단어를 좀더 제한적으로 정의해서 이들을 배제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는 과거에 바이러스를 고려하면서 이 문제에 부딪힌 적이 있다. 바이러스는 생명의 일부 경향을 - 지속되고 증식하고 조직화하는- 보이지만 이러한 경향을 충분히 발전된 형태로 표출하지는 않는다. 기계와 생물의 행동 사이에도 확실한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계가 살아있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목적엔, 의미론적이고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건 우리의 편의에 가장 잘 부합하기만 하면 된다. 험티 덤티(Humpty Dumpty)가 그의 주목할만한 단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처럼. "I pay them extra, and make them do what I want" (역자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이야기임. 험티덤티가 glory 라는 단어를 이상하게 사용하자 엘리스가 그 의미를 묻는다. 험티덤티는 이렇게 답한다. 'When I use a word, it means just what I chooseit to mean -- neither more nor less.' 그리고 impenetrability 라는 단어의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When I make a word do a lot of work like that, I always pay it extra.')</p>
<p>만일 우리가 "생명" 이란 단어를 부분적으로 엔트로피 증가의 흐름에 역행해서 헤엄치는 모든 현상을 포함하도록 사용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되면 우리가 흔히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유사성이 없는 천문학적인 현상들을 생명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의견으로는 "생명", "영혼", "vitalism" (역자주: 생기론. 생명에는 물리, 화학적 요소 이상의 것이 있다는 원칙) 등과 같은 의문을 남기는(question-begging) 용어들을 피하고, 단순하게 기계와 연관지어서 이야기하는게 최선이다. 왜냐면 기계 역시 거대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프레임웍 내에서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지역을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인간과 닮지 않았다고 할 이유가 없기때문이다.</p>
<p>살아있는 유기체를 기계와 비교할때 나는 한순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생명의 물리적, 화학적, 정신적 작용이 생명을 모방하는 기계의 그것과 같다는걸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단순히 그들이 둘다 지역적인 반-엔트로피 과정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는걸 의미할 뿐인데, 이러한 반-엔트로피 과정은 생물학적이나 기계적인 용어에 적절하지 않은 다른 많은 방법들에 의해서도 예시될 수 있을 것이다.</p>
<p>자동화 분야처럼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분야에서 생명을 모방하는 오토마타에 관한 범용적인 문장을 만들어내긴 불가능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이 기계들에 일반적인 기능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한가지는 그들이 특정한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라는 것인데, 때문에 그들은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의 팔이나 다리에 해당하는) 실행기관을 반드시 가지고 있다. 두번째는 그들이 광전지나 온도계와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와 공명한다는 것인데, 이 감각기관은 주변환경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못한 작업을 기록할 수 있게 한다. 이 마지막 기능은, 앞서 언급했듯이, 피드백이라 불리는데, 과거의 수행 작업을 통해 미래의 행동을 조정할 수 있게 한다. 피드백은 일반적인 반사작용처럼 단순한 것일 수도 있고, 과거의 행동이 특정한 움직임만을 조정하는게 아니라 행동의 정책 전부를 조정하는 높은 수준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정책-피드백은 우리가 아는 한가지 측면에서는 조건반사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한 측면에서는 학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p>
<p>이런 형태의 모든 행동과 그리고 특히 더 복잡한 행동에는 피드백된 정보에 기반해 기계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중앙 의사결정 기관이 있어야 하며, 피드백된 정보는 생명체의 메모리와 유사한 기구에 저장된다.</p>
<p>빛을 향에 달리거나 빛으로부터 도망치는 단순한 기계를 만드는건 쉬운 일이다. 만약 이 기계들 자신이 빛을 낸다면 몇 개의 기계들이 모이면 그레이 월더 박사가 그의 책 "The Living Brain"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복잡한 형태의 사회적 행동을 보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런 종류의 좀더 복잡한 기계들이 단순히 기계 자체의 가능성과 기계의 유사체인 신경시스템을 탐구하기 위한 과학적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개발중인 기술이 가까운 미래에 이들 잠재력의 일부를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할 만하다.</p>
<p>신경계와 자동화 기계는 이들이 과거에 내렸던 판단들을 근거로 판단을 내리는 장치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닮아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기계 장치는 스위치를 열거나 닫는 2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신경계에서 개별적인 신경섬유 역시 자극을 전달할지 말지를 판단한다. 기계와 신경 양쪽 모두, 과거의 판단을 근거로 미례의 판단을 내리는 특정한 기구를 가지고 있다. 신경 시스템의 경우 이 작업의 대부분이 "시넵스"라 불리는 매우 복잡한 부분에서 이루어지는데, 시넵스로 여러 개의 신경섬유가 들어와서 한 개의 신경 섬유로 나가게 된다. 많은 경우에 이 판단들의 근거를 시넵스의 동작의 한계점으로 기술할 수 있는데, 다르게 말하면, 밖으로 나가는 섬유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들어오는 섬유가 작용해야 하는지가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p>
<p>이것이 기계와 생물간 유사성의 적어도 일부분의 기초다. 생물의 시넵스는 기계의 스위치 장비에 해당한다. 기계와 생물간의 좀더 자세한 관계는 월터 박사와 로스 애쉬비 박사의 매우 영감을 주는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 W. Ross Ashby, Design for a Brain, Wiley, New York, 1952, and W. Grey Walter, The Living Brain, Norton, New York, 1953)</p>
<p>기계는 생물과 마찬가지로, 앞서 말했듯이, 엔트로피 증가의 일반적인 경향에 부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이다.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통해 기계는 황폐화 되려는 일반적인 경향을 가진 세계 안에서 자신의 주변에 조직을 형성하는 국지적인 영역을 형성할 수 있다.</p>
<p>과학자들은 항상 우주의 질서(order)와 구조(organization)를 발견하고자 연구하고 있고, 따라서 최대의 적인 무질서(disorganization)를 상대로 게임을 하고 있다. 이 악마는 마니교적인가 아니면 아우구스트적인가? 이것은 질서와 반대되는 힘인가 아니면 질서 자체의 부재일 뿐인가? 이 두 종류의 악마 간의 차이는 이들에 대항하는 전략에서 드러날 것이다. 마니교적인 악마는 다른 적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이기고자 하며,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교활한 술수와 위장술도 마다하지 않는 적이다. 특히, 그는 혼란의 정책을 숨길 것이며 우리가 그의 정책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이면 우리를 어둠속에 남겨두기 위해 정책을 바꿀 것이다. 반면에, 아우구스트적인 악마는 그 자신이 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약함의 척도일 뿐인데, 밝혀내기까지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필요로 하겠지만 일단 밝혀냈다면 그것을 몰아낸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악마는 단순히 우리를 좀더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이미 밝혀진 정책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마니교적인 악마는 우리를 상대로 포커 게임을 하고 있으며, 기꺼이 블러핑을 사용할 것이다. 블러핑은 폰 노이만이 그의 게임이론에서 설명했듯이 단순히 블러핑을 통해 이기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블러핑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통해 상대방이 이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사용된다.</p>
<p>이 마니교적 악마가 세련되게 악한데 비해 아우구스트적 악마는 멍청하다. 그는 까다로운 경기를 하긴 하지만 우리의 지능을 통해 성수를 뿌린 것처럼 철저하게 무찌를 수 있다.</p>
<p>악마의 본성에 관한 것으로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격언-격언이라고 하기엔 좀더 의미있는-이 있는데, 실로 과학적 방법의 토대에 관한 문장이다. "신은 교묘하지만, 단순히 못된건 아니다". 여기서 "신"이란 단어는 우리가 그의 매우 충직한 종인 악마의 탓으로 돌렸던, 자연의 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이 힘이 블러핑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어쩌면 이 악마는 의미에 있어서 메피스토펠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가 누군지 물었을때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답했다. "항상 악함을 추구하면서 항상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다." 다르게 말하면, 악마는 속이는 능력이 무한하지는 않다는 것이고, 그가 탐구하고 있는 우주에서 우리를 혼동시키려 마음먹고 있는 선한 힘을 찾으려는 과학자들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해독되는 것에 저항하지만, 우리의 외부세계와의 통신을 교란시킬 새롭고 해독하기 어려운 방법을 찾는데는 그다지 재능이 없다.</p>
<p>자연의 수동적인 저항과 적군의 능동적인 저항 사이의 차이는 과학자와 전사 혹은 게임 플레이어 사이의 차이를 시사한다. 물리학자는 그의 모든 시간을 그의 실험을 수행하는데 보내며, 자연이 조만간 그의 속임수와 방법을 알아내서 자신의 정책을 바꿀 것이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그의 최고의 순간에 의해 결정되는데, 반면에 체스 플레이어는 단 하나의 실수를 하더라도 기민한 상대방이 그 실수를 이용해 그를 무찌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체스 플레이어는 그의 최고의 순간 보다는 최악의 순간에 의해 좀 더 좌우된다. 이 주장에 대해선 나 자신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내 자신이 과학 분야에서는 잘 하고 있지만 체스에서는 중요한 순간에 부주의로 계속 게임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p>
<p>그러므로 과학자는 반대편인 그의 정적을 명예로운 적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효율적인 사고를 하는 과학자에게 꼭 필요하기도 하지만, 전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절조없는 바보처럼 되어버리기도 한다. 또한, 일반적인 대중들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연 혹은 자연에서 생긴 적대자들보다 개인적인 적대자들에 대해 더 염려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p>
<p>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열역학 제2 법칙에 복종하는 삶에 빠져있는데, 혼란은 증가되고 질서는 줄어든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닫힌 시스템 전체에서는 유효한 열역학제2 법칙이 닫혀있지 않은 부분에서 볼땐 절대 유효하지 않다. 엔트로피가 줄어들고 있는 어떤 섬이나 지역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 전체적으로는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섬들의 존재로 인해 진보의 존재를 주장한다. 진보와 증가하는 엔트로피 간 전투의 보편적인 방향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p>
<p>우리가 알다시피 계몽주의 시대는 진보라는 아이디어를 조성하고 발전시켰지만, 18세기 중 어떤 무리들은 이러한 진보가 수확 체감의 법칙 (the law of diminishing returns)에 의해 다뤄져야 하고, 사회적 황금기에서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 구조의 균열에 따라 여기저기서 진보에 대한 의심이 나타났다. 예를들어, 맬서스는 그의 시대의 문명이 통제되지 않는 인구 증가라는 구렁텅이로 빠져 인류가 그동안 만들었던 모든 수확을 삼켜버리기 직전이라고 생각했다.</p>
<p>맬서스에서 다윈으로 이어지는 지적 계통은 명확하다. 진화론에서 다윈의 혁신성은 그가 진화를 높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향상되는 라마르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생물이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봤다는 점이다: (a) 다양한 방향으로 발달시키는 자연적인 경향과 (b) 자신의 선조들의 패턴을 모방하려는 경향이다. 이 두가지 효과의 조합은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지나치게 무성해지려는 자연을 잘라내고 환경에 잘못 적응된 조직을 없앤다. 이 잘라내기의 결과로 생물의 남겨진 패턴이 좀더 환경에 잘 적응되도록 한다. 다윈에 따르면, 이 잔여 패턴은 보편적인 목적을 가진것처럼 보이게 된다.</p>
<p>잔여 패턴(residual pattern)의 개념은 로스 애쉬비 박사의 연구를 통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그는 이것을 학습하는 기계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는 무작위적이고 무계획적인 구조의 기계는 평형상태에 가까운 위치를 가지기도 하고, 평형상태와는 매우 거리가 먼 위치를 가지기도 할텐데, 평형상태에 가까운 패턴이 그 특성상 오랫동안 지속되고 그렇지 않은 패턴은 일시적으로만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 결과로 다윈의 자연처럼 애쉬비의 기계도 목적을 가지지 않고 구성된 시스템에서 목적을 가진것 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건 단순히 무목적성(purposelessness) 자체가 그 본성상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국에는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그 위대하고 자명한 목적이 그 어떤 것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간 단계에서는 생물과 생물의 사회가 서로 다른 부분들이 협심해서 어느 정도 의미있는 패턴을 만들어내는 상태로 좀더 오랫동안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p>
<p>목적을 가지지 않는 무작위의 기계장치가 학습의 절차를 통해 자기 고유의 목적을 찾게 된다는 애쉬비의 명석한 아이디어는 철학적으로도 큰 기여를 했을뿐 아니라 자동화 분야에서 매우 유용한 기술적 발전을 끌어낼 것이다. 우리는 기계에 목적을 구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계 고장을 일으키는 특정한 결함을 회피하도록 설계된 기계가 대부분의 경우에 스스로 달성할 수 있는 목적을 찾게 될 것이다. (역자주: 그 당시에 저자는 이렇게 믿었는지 몰라도 오늘날 까지도 이건 좀 허무맹랑한 믿음이다)</p>
<p>19세기에서 조차도, 진보에 대한 사상에 끼친 다윈의 영향력은 생물학적 세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당시 얻을 수 있는 자료들로 부터 모든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그들의 과학적 사상을 구상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와 그의 동시대 사회주의자들 역시 진화와 진보의 분야에서 다윈의 관점을 수용했다는 점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p>
<p>물리학에서 진보라는 개념과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서로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치되는 개념이다. 뉴턴의 연구에 직접적으로 종속적인 형태의 물리학에서는, 정보는 진보에 기여하고 엔트로피의 증가에 반대방향인데, 정보의 전송은 극히 적은 양의 에너지만으로도 혹은 심지어 전혀 에너지가 전혀 없이도 이루어 질 수 있다. 이 관점은 20세기에 와서 "<strong>양자역학</strong>" 이라는 물리학의 혁신에 의해 수정됐다.</p>
<p>양자이론은 에너지와 정보의 관계를 새로 정립했다. 이 관계의 대략적인 형태는 전화회선 혹은 증폭기의 회선 잡음에 관한 이론에 나타난다. 그 배경 잡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전류를 운반하는 전자들의 불연속적인 속성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보를 파괴하는 확실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선은 자신의 에너지로 인해 메세지가 밀어닥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유효한(적법한) 통신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빛은 원자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주파수의 빛은 광양자라는 덩어리에서 열을 발하는데, 이 광양자는 그 주파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개의 광양자보다 더 적은 에너지를 가지는 빛은 있을 수 없다. 정보의 이동은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소비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데, 이때문에 에너지의 결합과 정보의 결합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광양자는 매우 작고, 그래서 효과적인 정보의 결합에 필요한 에너지 이동의 양도 매우 작다. 그 말은, 직간접적으로 태양광선의 영향을 받게 되는 나무 혹은 사람의 성장 과정을 고려해 봤을때, 적당량의 에너지 이동으로도 엔트로피의 엄청난 감소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의 기본이 되는 사실들 중 하나이다. 특히 광합성 이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식물이 태양 광선을 이용해서 물과 이산화탄소로부터 탄수화물 및 다른 여러가지 생활에 필요한 복잡한 화학물질들을 만들어 내는 화학적 과정이 그렇다.</p>
<p>그러므로 열역학 제 2법칙을 비관적으로 해석할 것인지 말지 하는 문제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주 전체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다른 한 편으로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부분적으로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섬에 부여하는 중요성에 달려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엔트로피 감소의 섬들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우리가 그런 다른 섬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가까운 곳과 먼곳의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차이는 우리에게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질서가 증가하는 지역이 전체적인 우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예를 들자면, 어쩌면 생명은 태양계에서만 일어나는 우주의 희귀한 현상일 수 도 있다. 혹은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정도의 레벨에 해당하는 생명을 고려한다면 지구에서만 볼 수 있는. 그렇지만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고,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그다지 큰 걱정거리는 아닐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나머지 우주의 크기에 비례해봤을때 작은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p>
<p>다시 한 번, 생명이라는 것은 제한된 기간의 일부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는데, 최초의 지질연대 이전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언젠가는 다 타버리건 꽝꽝 얼어버린 행성으로 변하건 간에 이 지구가 생명이 없는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화학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물리적인 조건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같은 사람에겐 지구상에 어떤 형태의 생명이건, 인간의 생명과 비슷한 종류가 아닌 생명도 포함하더라도, 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행운같은 우연이 결국 완전하고 끔찍하게 끝날 것이라는건 기정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존재라는 이 일시적인 우연과 인간의 존재라는 훨씬 더 일시적인 우연을, 곧 사라져버릴 특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지도록 우리의 가치를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p>
<p>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불운한 행성의 난파된 배 위의 승객들인 것이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었다고 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나 가치, 중요성까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는데,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침몰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에 걸맞게 그렇게 되도록 놔두자.</p>
<p>여기까지 우리는 비관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비전문가들의 감성적인 비관론이라기 보다는 전문적인 과학자들의 지적인 비관론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엔트로피의 학설에 대해 알게됐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 보다 우주 최후의 heat-death(entropy가 최대가 된 열 평형 상태)가 엄청나게 우울한 도덕적 결과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적인 미래의 결과조차도 보통 감성적으로 행복해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보통의 미국인들에는 더 생소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에 있는 우주의 진보적 역할에 우리가 최대한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 안에서도 진보를 시도하려는 우리의 비전이 그리스 비극의 끔찍한 공포를 몰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비극을 그다지 포용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p>
<p>평균적인 미국 상위 중산층의 어린이들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세심하게 배려하여 죽음과 파멸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가이드한다. 그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전래동화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슬프게 운다. 그러나 진실은 결코 자신만의 판테온에 존재하는 자신의 신이 없어지는 것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감성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한다.</p>
<p>사실은 개인의 죽음이나 갑작스런 재앙은 그 후반부의 삶에서 겪었던 경험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불행한 사실들을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고쯤으로 쳐버리고나서, 이 지구에 불쾌함은 존재할 수 없는 천국을 만들려고 한다. 이 땅위의 천국은 그에게 영원한 진보와 더 좋은 것과 더 큰 것으로 나아가는 계속되는 상승을 뜻한다.</p>
<p>우리가 진보를 숭배하는 이유는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 사실적인 관점과 도덕적인 관점-즉, 허용과 비허용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는 관점이다. 사실적으로 보면, 과거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며 진행되던 진보는, 이것이 시기적으로는 현대시대의 시작과 일치하는데, 인간의 환경을 지배하는 새로운 기술의 발견과 발명으로 무기한 계속될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말하길, 이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머지않은 미래에 중단될 일은 없으며 끊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지속될 것이다. 진보적인 사상을 도덕적인 원칙으로 유지시키려는 이들은 이 무제한의 자연스러운 현상처럼보이는 변화의 과정이 '<strong>좋은 것</strong>'이라고 여기며, 미래의 자손들에게 만들어 줄 지구 위의 천국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원칙으로서의 진보를 믿지 않지만 사실로서의 진보를 믿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의 기독교 교리문답서에 나오듯이, 한 쪽을 믿으면 다른 쪽도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p>
<p>우리 대부분은 진보의 이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 믿음이 역사적 기록상으로는 단지 작은 부분에 속할 뿐이라는 점과 이것이 우리의 종교적인 의식과 전통에 날카롭게 대립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카톨릭, 개신교, 혹은 유대교에서도 세상은 지속적인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strong>좋은 곳</strong>이 아니다. 교회는 선행을 행하면 그 대가를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돈이 아니라 천국에서 받을 약속으로서 지불한다.</p>
<p>본질적으로는, 칼뱅파도 이것을 믿는데, 다음과 같은 암울한 한 가지 항목이 추가된다. 즉 최후 심판의 날, 하나님이 선택하실 아주 적은 소수만이 엄청나게 어려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되며, 이 선택은 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선택받는데 있어서 지상에서의 선행이나 도덕적인 올바름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많은 선한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칼뱅파들은 천국에서조차 자신들에게 허락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축복을 당연히 지상에서 기대하지 않는다.</p>
<p>히브리 선지자들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선택받은 족속 이스라엘도 포함해서 말이다. 욥이 보여준 위대한 도덕성은, 그에게 영혼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고 주께서 황송하게도 그의 양떼와 가족과 하인들을 다시 돌려주시기는 했지만, 비교적으로 행복한 이러한 결과조차도 하나님의 독단적인 의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p>
<p>진보의 신봉자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도, 땅위의 삶이 끝난 후 상으로 받게 될 사후 세계의 존재를 찾기보다는, 땅위에서 그들의 천국을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지상의 천국이 투쟁없이 저절로 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미래에 거대한 캔디로 된 산(Big Rock Candy Mountain)을 찾게 될거라고 믿지않는 만큼 자신이 죽은 후 갖게 될 하늘위의 약속된 땅에 대해 의심한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 라는 뜻을 이름으로 가진 이슬람교도들도 마찬가지로 진보의 개념과 이상을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 관해서는, 이 종교의 운명의 수레바퀴 부터의 해방과 열반에 대한 기대를 보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불교는 엄격하게 진보의 사상에 반대하며 인도의 유사한 모든 다른 종교역시 마찬가지다.</p>
<p>19세기 말에 많은 미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진보에 대한 편안하고 수동적인 믿음 외에 좀더 남자답고, 활기찬 의미를 지닌 것이 있다.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진보는 서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진보는 서부 개척지의 경제적 혼란을 의미하며, 오언 위스터(역자주: 서부 소설의 대부라 불리는 작가)와 테어도어 루스벨트(역자주: 미국의 26대 대통령이자 18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함)의 활기찬 산문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서부개척은, 당연히, 실제했던 현상이다. 오랫동안 미국에서의 개척은 서쪽으로 멀리 놓여있던 황무지를 배경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이 개척에 대해 점점 감상적이 되가던 많은 사람들은 과거를 아쉬워하고 있다. 1890년에 이미 사실상의 개척에 대한 상황이 끝났음을 인지한 조사가 있었다. 이 나라의 사용되지 않고 보여지지 않은 자원에 대한 위대한 작업의 지리적 한계가 깨끗하게 끝난 것이다.</p>
<p>보통 사람이 진보를 그에 걸맞는 적절한 크기로 축소하는 역사적 관점을 가지기는 어렵다. 시민전쟁(Civil War. 역자주: 1861~65 미국 남북전쟁)때 사용됐던 머스킷총은 워털루 전쟁(역자주: 1815년 나폴레옹이 연합군에 패한 전쟁)때 사용됐던 머스킷총을 단지 약간만 개선한 것이었고, 저지대(역자주: the Low Countries, 유럽 북해연안 국가의 지역.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지역)의 말보로 군대가 사용했던 브라운 베스(역자주: 18세기 영국군의 주력소총)와 거의 교환가능한 것이었다. (역자주: 말보로 전쟁은 1702~1713 사이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었음) 한편, 권총은 15세기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고, 대포는 그보다 100년정도 앞선다. 활강식 머스킷 총이 사격 거리에 있어서 활 보다 크게 앞서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리고, 머스킷 총이 활보다 정확도와 장전속도에 있어서 떨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활은 거의 개선된게 없는 석기시대 발명품인데도 말이다.</p>
<p>또한, 선박 기술이 완전히 정체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목조 군함(man-of-war, 역자주: 돛을 달고 대포를 장착한 배)은 17세기 초반 이후 근본에 있어서 바뀐게 없다. 심지어 이 배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도 수 세기 이전부터 이어지는 계보가 있었다. 콜럼버스의 선원중 한명이 파라구트(역자주: 남북전쟁 당시의 미 해군 장교)의 배에서도 유능한 선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사도 바울을 몰타 섬으로 데려다 줬던 배의 선원도 요셉 콘라드(역자주: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 장교)의 소형 범선에서 선실 선원으로 충분히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키아(역자주: 로마의 속국이 되었던 루마니아 고대 지명) 지역의 로마인 목동은 충분히 경쟁력 있는 카우보이가 되어 긴 뿔 황소들을 택사스의 초원에서 기차 종착역까지 몰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종착역에 도착하면 거기서 보게 될 것에 놀라움으로 충격을 받게 되겠지만 말이다. 바빌로니아의 신전 사유지 관리인은 남부 농장에서 장부를 정리하거나 노예를 다루는데 있어서 별다른 교육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요컨데, 대다수 사람들의 주요한 생활 환경은 반복되어 왔고, 르네상스와 위대한 항해의 시대 전까지 혁명적인 변화는 시작 조차 되지 않았고, 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빠른 생활 속도는 19세기에 와서야 시작됐다.</p>
<p>이런 상황에서 증기기관, 증기선, 기관차, 제련기술, 전보, 해저 케이블, 전기의 도입, 다이나마이트와 미사일, 비행기, 전기 벨브와 원자폭탄 등의 성공적인 발명에 견줄만한 것을 역사의 다른 시기에서 찾는건 무의미하다. 청동기 시대의 도래를 알렸던 야금술의 발명들은 시기적으로 집중되어 있지 않았고, 다양하지도 않아서 반례가 되지 못한다. 고전적인 경제학자는 정중하게 이러한 변화가 순전히 정도에 있어서의 변화이며, 정도에 있어서의 변화가 과거에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리크닌(역자주: 극소량이 약품으로 이용되는 독성물질)의 약효가 있는 투여량과 죽음을 초래하는 양과의 차이도 역시 정도의 차이다.</p>
<p>오늘날, 과학적 역사학과 과학적 사회학은 다음과 같은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한 시대의 사회적 매커니즘은 다른 시대의 사회적 매커니즘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학문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특수한 사례들은 서로 충분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분명한 사실인데, 근대 역사의 시작 이후 모든 현상들의 스케일이 너무 많이 변해서 현대 시대의 정치적, 인종적, 경제적 개념을 과거 단계로부터 쉽게 전이할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발견의 시대로 시작된 근대 시대는 그 자체가 고도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p>
<p>발견의 시대에 유럽은 유럽 전체의 인구를 초과할만큼의 거대한 미정착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황금과 은 뿐만 아니라 다른 무역가능한 상품들을 포함한 개발되지 않은 자원들로 가득한 땅 말이다. 이 자원들은 고갈될 일이 없어 보였고, 실제로 1500명이 이주할만한 규모였으며, 가까운 미래에는 자원이 고갈되거나 인구증가가 정체될 것 같지 않았다.</p>
<p>그러나, 새로운 땅의 존재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정신나간 티-파티와 같은 태도를 부추겼다. 한 자리의 차와 케잌을 다 먹으면 미친 모자장수와 3월의 토끼가 하는 일은 자리를 옮겨서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한 바퀴를 돌아 자기들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면 어떻게 되는지 앨리스가 물었을때, 3월의 토끼가 대화의 주제를 바꿔 버렸다. 지나온 역사가 5000년이 안되는 사람들과, 새천년을 기다리거나 최후 심판의 날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겐 이 정신나간 모자 장수의 방침이 가장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미국식 티 테이블이 무궁무진한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한 개의 좌석을 버리고 다음 좌석으로 옮겨가면서 버려진 좌석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그 증가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p>
<p>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친 것은 지난 마지막 400년간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특별한 기간이었다는 점이다. 이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의 속도는 그 변화의 성질상 이전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례들이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론 커뮤니케이션 발달의 결과일 수도 있겠고,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 또한 증가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 처럼 제한적인 행성인 지구에서는 자연에 지배당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가질 수록 적게 남길 수 밖에 없게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가 살아남기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안 좋은 시기에 우리가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발전시킨 기술의 노예가 되었고, 노력만으로 우리의 키를 한 뼘 더 키우거나 줄일 수 없는 것처럼 뉴햄프셔의 농장을 1800년대 그랬던것처럼 자급자족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우리의 환경을 너무 빨리 극적으로 변화시킨 덕분에 우리 자신을 빨리 극적으로 변화시켜야만 이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예전 세상에서 살 수는 없다. 진보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한점도 제시한다. 아마도 진보 자체와 증가하는 엔트로피에 맞서는 우리의 싸움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내리막길에서 끝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극적인 감상은 무지함과 게으름 때문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우리의 문명과 인류가 멸망하기 훨씬 전에, 새로운 환경이 우리에게 부여한 새로운 요구를 깨닫고 이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가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듯이 인류도 결국은 멸망하겠지만 말이다. 어찌됐건, 곧 다가올 마지막 죽음은 완전한 생명의 좌절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문명과 인류와 그 속에 포함된 개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인류 문명의 최후의 파멸을 맞을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확실히 다가올 개인적의 죽음을 맞설 용기가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진보에 대한 단순한 믿음은 강인함에서 비롯된 확신이 아니라 묵인에 의한 것이고 그래서 나약함에 의한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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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man Use of Human Beings<br>
2장. 진보와 엔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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